
FORM STUDY
시각적으로 가장 먼저 인식되는 부분은 겉으로 드러나는 사물의 형태 –form–이다. 사물의 첫인상, 다른 무엇보다 가장 먼저 뇌리에 가닿는 부분, 그것이 form이며 그렇기에 중요하다.
1학기 입체조형 수업에서는 입체 조형의 개념을 정의하고, 조형요소와 조형원리를 배우며, 미적으로 아름다운 입체 조형물에 관해 탐구한다. 더 나아가 조형물 제작에 사용되는 도구–열선 절단기, 레이저 절단기 등–의 사용법을 익히며, 최종적으로 미적으로 우수하면서도 독창적인 입체 조형물을 제작한다.


유기물과 인공물 등 여러 입체물을 조사해, 입체 조형의 개념을 익히고 입체 조형의 방법 및 유형을 익힌다. 이번 프로젝트는 유기적인 입체물을 탐구하고, 나아가 아름다우면서 독창적인 유기적 입체물을 제작하는 것이 최종 목표다.

나는 쉽사리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바다에서 삶을 영위하는 생물들에서 영감을 얻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중에서도 클리오네로 알려진 무각거북고둥, 보름달물해파리, 감투빗해파리 등 발광생물에서 모티브를 얻어, 마리아나 해구에 있는 10,714m 깊이의 Sirena Deep과 Challenger Deep에 생존하는 가상의 생물을 창조하고자 했다.
이제, 깊은 심해로...



10,508m
수심 500미터 지점의 차가운 물 속에서 살아가는 연체동물, 무각거북고둥이 모티브인 생물이다. 반투명한 몸 너머로 해저의 부유물이 일렁이며, 약동하는 내부 기관이 분홍빛을 발한다. 마리아나 해구 Sirena Deep의 온도가 0~3°C인 부근에 주로 서식한다.



10,714m
투명한 몸에 고리 모양의 무늬를 가진 보름달물해파리에서 모티브를 얻은 생물이다. 투명에 가까운 몸에 수많은 야광 반점이 수놓아져 있다. 야광 반점은 아래로 갈수록 그 수가 늘어나 생물의 몸을 빼곡하게 채운다. 마리아나 해구 Sirena Deep의 비교적 얕은 곳에 서식한다.



이 작업은 목업까지 진행했는데 - 목업 작품은 보다 더 깊은 심해에 위치해있다- 그 과정이 참으로 다사다난했다. 공업디자인과란 이런 학과인가? 라는걸 몸으로 체감하게 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폼을 열선 절단기로 깎아내고, 사포로 원하는 형태를 조금씩 만들어나가며... 원시인이 불을 피우기 위해 열심히 돌을 문지르듯 사포질 했다. -실제로 스티로폼에 사포질을 하다보면, 열이 점점 올라 불이 날 것만 같았다... 불을 바라는 원시인만큼 간절하기도 했고. - 그리고 그 위에 핸디코트를 발라주면, 다시 사포와 2차전이 시작된다.
그 과정에서 스티로폼 조각, 핸디코트 가루를 무수히 폐에 축적시켰을 것이다. 어쩌면 작업물의 반은 이미 나와 함께 할지도... 이렇게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이 수업은 그만큼 의미가 크다. 내 몸에 상당수 축적되었다는 부분에서도 그렇지만, 입체물로서의 구현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나는 그동한 굉장히 많은 형태들을 '그려왔다' . 그린다는 것도 물론 의미깊은 시각화 작업 중 하나다. 하지만 펜 선이 입체가 될 때, 그렸을 때는 알 수 없었던 새로운 것들을 체감하게 된다. 입체물과는 좀 더 직접적으로 상호작용하게 된다고 할까. 움직이지 않아도, 관람자의 시각이 변하는 것만으로도 입체물은 시시각각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내가 가상의 생물 컨셉으로 입체물을 구성한 것도, 이 상호작용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핸디코트의 뿌연 가루들을 걷어내고 마주한 입체물은, 마치 나와 상호작용하는 가상의 생물 같았다.
10,984m


수심 600-1,100m에서 서식하며, 무지갯빛으로 발하는 감투빗해파리에서 모티브를 얻은 생물이다. 해저 속에서도 은은하게 빛을 발하며, 그 빛은 무지갯빛으로 산란한다. 마리아나해구의 가장 깊은 해협, Challenger Deep에 서식한다. 현재 그 표본이 해양박물관에 보관되어있으나, 생을 잃은 개체는 더이상 무지갯빛을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해양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심해 생물... 이 아니고 내가 만든 입체물이다. 앞서 입체물이 가상의 생물 같다고 말은 했지만, 키네틱 아트가 아닌 이상 입체물은 멈춰있다. 나는 그 점이아쉬웠다. 그런 아쉬움이 이 입체물을 심해에서 살게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입체물이 빛을 내며 해저를 떠다니고, 내부 기관이 약동하며, 살아갈 수 없으리라 생각되는 곳에서도 생을 이어가는 - 그런 모습을 보고 싶었을런지도 모르겠다.